본문 바로가기
세상 알아가기/세상, 사람, 인생

[스크랩] 소비자주의: 누구도 참지 않는 사회

by 푸른신발 2024. 4. 12.

https://www.facebook.com/yesrevol/posts/pfbid02hFA5nyMHY1vL6NPzt5pcfFYfzZJvTmXLGRU6zjrJpER2HE8WkxCzr5fyzBCJDLkLl

 

 

능력주의의 친족인 소비자주의로 인해

모두가 참지 않는 소비자가 되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통찰이 깊이 동의가 되었다..

 

<2023년 9월 10일 박정훈님 페이스북 게시물 스크랩>

소비자주의: 누구도 참지 않는 사회
대전에서 사망한 초등교사가 4년 동안 학부모 민원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지면서, '악성 민원'을 넣은 학부모 중 한 명이 운영한다고 알려진 김밥집에 시민들의 분노가 집중되고 있다. "살인자"라는 포스트잇이 붙었고, 입구에는 피처럼 보이는 케첩이 뿌려져있다. 해당 김밥집의 프랜차이즈 본사인 '바르다김선생'측은 해당 지점의 영업을 중단했다고 밝혔다.
최근 불거진 교사들에 대한 갑질과 민원들이 '소비자주의'의 발현이라면, 그것에 대한 복수 역시 너무나 '소비자주의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비자'가 되는 시대가 만들어 낸 참상이다.
사회비평가 박권일은 <토론의 즐거움>에 쓴 글에서 '소비자주의'에 대해 "'소비자가 왕'이라는 마인드이고, '구매자가 응당 지니는 메리트'라는 점에서 이는 '자격적합성의 정치'인 능력주의(meritocracy)의 친족이념"이라고 규정한다 .
올바른 태도나 가치관을 배우는 '교육'의 측면보다는 그저 '무사히 아이를 돌보는 서비스' 정도로 공교육이 여겨짐으로써, 소비자주의가 발동된다. 교사의 훈육은 진상 부모들에겐 자식을 '정서적으로 고통을 준 것'으로서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의무 위반이라고 여긴다. 여기서 진상 부모들은 자식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네가 뭔데 '내 소유'인 자식을 훼손하느냐는 이야기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네가 월급을 받는데, 왜 학부모의 말을 듣지 않느냐는 황당한 논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입시 중심 교육' 시스템에서 공교육 교사는 '스승' 혹은 '교육 전문가'라는 지위를 서서히 잃어갔고, 이는 훈육을 위임하는 구조까지 위협했다. 교사가 전문성과 권위를 바탕으로 '더 나은 가르침'을 줄 거라는 믿음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음에도, 우리 사회는 교사의 권한이 부모를 '대리'하는 수준으로 축소되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 그것이 결국 공교육에서의 소비자주의 발현으로 나타난 셈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선 교사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안 된다. 평소에는 규정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부모나 학생의 요청이 있을 때는, 배달 앱에서 덜 맵게 해달라거나 오이를 빼달라는 요청을 들어주듯이 뜻하는대로 해주면 그만이다 ('우리 가게 음식은 레시피대로 먹어야 맛있어요 해봤자 악플만 달리는 걸 본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한 인간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될리 만무하지 않은가.
소비자주의는 갑과 을을 명확히 구분한다. 돈을 주는 자가, 무엇인가를 소유한 (혹은 사회적으로 소유한 것으로 간주되는) 자가 '갑'이다. 반면 돈을 받거나 소유하지 못한 자는 을이다. 소비자주의는 내가 쓴만큼, 내가 가지고 있는만큼 대접받길 원한다. 그리고 그 욕망이 당연하다고 정당화한다. 배달시킨 음식이 조금 늦게 와서, 돈이 아깝게 느껴지면 별점 1점과 악평을 날려도 괜찮다고 한다. 자주 쓰던 앱이 오류가 나면 콜센터에 전화를 해 막말을 해도 괜찮다고 한다. 노동과 노동자를 이해하기보다는 '내가 쓴 돈'이나 소유권을 먼저 생각해도 괜찮다고 한다.
수많은 언론과 커뮤니티에서 진상 갑질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왜냐햐면 너나할 것 없이 소비자주의를 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들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럴까.
이를테면 배달시킨 음식이 엉망으로 왔을 때, 짜증이 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음식점이 바빠서 조리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든, 배달 기사가 초보라서 집을 잘 못 찾았든, 이런 것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돈을 쓴 것과, 기다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먼저 들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전화를 해서 교환을 요구하거나 혹은 참았겠지만, 더 '강한 행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 속에서 소비자주의는 기승을 부리고 있다. 배달 앱에, 지도 앱에 악플을 달 수 있고, 동네 커뮤니티에 글을 쓸수도 있다. 그것이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라고 믿는다. 내가 돈을 쓴 것에 상응하는 상품이 오지 않았거나, 자신이 소유한 상품(물건이나 아파트 혹은 '자식'이 될 수도 있다)에 문제가 생겼을 때의 '부당함'이 모든 감정을 압도한다. 서로의 노동에 대한 이해, 도덕과 규범은 뒷전이 되고 타인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권리만 남는다. '내가 돈을 썼으니까'
자본을 초월하는 가치,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공동체의 윤리가 깨진 공간에서 소비자주의는 더욱 강해진다. 나를 보호해 줄 안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 정체성만이 오로지 나를 '갑'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소비자 노릇을 하게 된다. 공공의 영역이 자본에 침식당하면서 더 이상 소비자주의가 손을 뻗치지 못하는 곳은 없으니, 그렇게 '누구도 참지 않는 사회'가 온다.
그러나 '누구도 참지 않는 사회'에서 결과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대부분 더 약한 사람들이다. 교장이 아닌 일선 교사가, 기업 간부가 아닌 콜센터 노동자가, 고위 공무원이 아닌 말단 공무원이, 돈과 권력으로 사건을 무마할 수 있는 이가 아닌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소비자 정체성을 통해 권력 관계를 뒤엎는 통쾌한 순간도 있지만, 그건 잠시일 뿐이다. 앞서 박권일 비평가가 '누구도 참지 않는 사회'가 일종의 능력주의라고 일컬었던것처럼, 누구도 참지 않는 사회의 승리자는 '더 많은 능력을 입증하는' 사람이다. 참지 않았을 때 더 많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가 이긴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사회였던가.
대전의 한 김밥집에 쏟아지는 포스트잇과 케첩, 밀가루, 계란 등을 보며 '소비자주의'의 복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비자로서 과도한 권한을 행사해서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가, 역설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당하는 모습. 하지만 악성 민원 학부모로 추정되는 그의 직업이 고위 공무원이었거나, 대기업 간부였거나, 검사였다면 애초에 이렇게 쉽게 신상이 공개됐을까? 알려졌더라고 하더라도 그가 일하는 직장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이런 식의 '정의 구현'이 괜찮은지, 자꾸 되묻게 되는 이유다.
 

로그인 또는 가입하여 보기

Facebook에서 게시물, 사진 등을 확인하세요.

www.facebook.com

 

'세상 알아가기 > 세상, 사람, 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소년 가면 우울증  (0) 2023.07.20
[퍼온 글] 삶의 역설  (0) 2021.06.27
What is Success? by Ralph Waldo Emerson  (0) 2021.03.16
최진석 교수 인터뷰  (0) 2021.03.09
낯선 것, 익숙한 것.  (0) 2021.03.02